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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화폐 레크(lek)와 떠나는 역사 여행: 일리리아 왕국과 겐티우스 왕의 전설세계 화폐에 담긴 상징과 역사/중동부유럽 2024. 11. 6. 12:57728x90반응형
일리리아의 왕 겐티우스는 로마 제국에 맞선 일리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서 알바니아 지폐에 새겨져있다. 알바니아 화폐로 만나는 고대 일리리아의 역사
알바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대 일리리아인의 후손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발칸 반도에서 슬라브인들보다 훨씬 일찍 자리 잡은 선주민임을 주장합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이러한 역사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화폐에 일리리아 왕과 고대 유물들을 활용하여 대내외적으로 그들의 유구한 역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알바니아 화폐에 담긴 고대 일리리아의 상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고대 일리리아 왕과 화폐 속 상징들
알바니아의 2000 레크 지폐와 50 레크 동전에는 일리리아의 왕 겐티우스(King Gent, 기원전 181~168)의 초상이 담겨 있습니다. 겐티우스는 일리리아의 라베아탄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스코드라(현대 슈코더르)를 수도로 한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초기에는 로마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으나, 나중에 로마에 맞서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세우스와 동맹을 맺으며 반로마 정책을 펼쳤습니다. 겐티우스는 해적 행위를 묵인하고 로마 사절을 구금하며 갈등을 심화시켰고, 이에 따라 로마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기원전 168년 스코드라에서 겐티우스를 패배시켰습니다. 전쟁 이후 겐티우스는 로마에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갔고, 그의 왕국은 세 개의 행정 구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이후 로마는 일리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겐티우스는 그의 이름을 딴 식물 속(屬)인 겐티아나(Gentiana lutea)의 유래로 남아 있습니다. 지폐에는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겐티아나와 고대의 동전 이미지도 함께 그려져 있어 알바니아가 고대 일리리아 문명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일리리아 왕 겐티우스의 초상이 그려진 알바니아 화폐 2000 레크 지폐 앞면
한편, 2000레크 지폐 뒷면에는 부트린트 국립공원의 일부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트린트의 원형극장도 그려져있습니다. 알바니아 남부에 위치한 고대 유적으로,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이후 로마 시대에 확장되었습니다. 약 2,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극장은 연극 공연, 공공 집회, 종교 의식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아래 비바리(Vivari) 운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돌에 새겨진 여러 비문을 통해 당시 사회 구조와 노예 해방과 같은 사회적 관행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트린트의 원형극장이 그려진 2000레크 지폐 고대 일리리아 문화와 사회 구조
일리리아 문화는 석기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대략 기원전 2000년경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며 알바니아 지역에서 확립되었습니다. 일리리아는 단일한 민족 집단이 아니라, 서부 발칸 지역 전역에 퍼져 있던 여러 부족들의 연합체였습니다. 특히 알바니아의 고지대에 위치한 일리리아인들은 고립된 환경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사회 구조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알바니아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일리리아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고, 심지어 부족 연맹의 지도자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후 세계를 믿는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어, 무기와 개인 물품을 함께 묻는 장례 풍습을 유지했습니다.
2. 일리리아 유물과 동전 도안
알바니아는 동전 도안에도 고대 일리리아의 유물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20 레크 동전에는 고대 리부르네(Liburne) 배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벼우면서도 속도가 빠른 리부르네 배는 탁월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자랑했던 고대 일리리아 해양 문화의 상징이며, 강력한 해상 전력을 상징하는 유물입니다. 이 배의 뛰어난 성능 덕분에 로마인들도 이를 전투용 함선으로 채택하여 리부르니아(liburnian)라는 군함을 만들었습니다.
리부르네 배가 새겨진 알바니아 20레크 동전 앞면
또 다른 예로, 100 레크 동전에는 로마 제국과 맞선 용감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일리리아의 여왕 테우타(Queen Teuta)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테우타는 기원전 231년부터 228년까지 일리리아의 아르디아이 부족을 다스린 여왕 섭정이었습니다. 남편 아그론의 사망 후 왕국을 이어받아 의붓아들 피네스를 위해 섭정 역할을 했으며, 아드리아해에서의 해상 확장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일리리아 해적들이 로마의 무역을 방해하자, 로마는 이를 구실로 기원전 229년에 테우타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테우타는 패배하여 기원전 228년에 로마와 조약을 맺고 영토를 리수스(오늘날의 레저, Lezhë) 북쪽으로 제한하는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테우타 여왕이 새겨진 알바니아 100레크 동전 앞면
기원전 168년에 로마는 일리리아를 정복하고 일리리쿰(Illyricum) 속주로 삼았습니다. 로마 통치 아래에서 일리리아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으며, 아폴로니아 등지에서는 예술과 문화가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일리리아인들은 로마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의 언어였던 라틴어의 영향으로 알바니아어에는 라틴어 어휘가 유입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쇠퇴할 무렵, 군사적 전통을 지닌 일리리아인들은 로마 군대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기원후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중반 사이 제국의 지배자는 대부분 일리리아 출신이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황제로 데키우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있습니다.
3. 알바니아의 민족 정체성과 고대 유산 강조
알바니아는 1990년대에 접어들며 이러한 일리리아적 요소를 화폐에 적극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대 일리리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현대 알바니아와 연결시켜, 대내외적으로 알바니아 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특히, 일리리아 왕과 여왕의 이미지를 통해 알바니아 민족이 고대부터 이어져 온 독립적이고 강인한 민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언어학적 증거는 불명확합니다. 알바니아어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독립된 언어임은 확실하지만, 고대 일리리아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둘 사이의 연결을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알바니아어가 일리리아어가 아닌 멸종된 트라키아어의 방언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태입니다.728x90반응형'세계 화폐에 담긴 상징과 역사 > 중동부유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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