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

알바니아 민족 종교라는 벡타시 교단, 발칸반도에서 득세한 비결은?

르몽드 2024. 11. 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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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타시 교단은 알바니아의 민족 정체성을 상징하는 종교로 자리잡았다

 

알바니아의 Bektaşi 교단, 그 역사와 문화적 중요성

알바니아에서 깊은 뿌리를 내린 벡타시(Bektaşi)교단은 알바니아의 종교적 다양성과 독특한 문화를 대표하는 수피(Sufi) 신비주의 종파 중 하나입니다. 이 교단은 13세기 말~14세기 초 오스만 제국 시기에 창시되었으며, 강력한 군사 조직이었던 예니체리(Janissaries)와의 연결고리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습니다. Bektaşi교단은 창시자 하지 벡타시 웰리(Haji Bektash Veli)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발림 술탄(Balım Sultan)에 의해 16세기경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알바니아에서의 벡타시 교단 확산 배경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통치 이후, Bektaşi교단은 수니파 이슬람의 주요 종파와는 다른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종교 전통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알리(ʿAlī)와 12이맘을 숭배하는 등 시아파적 성향을 보였고, 기독교적 전통이 깊었던 알바니아 지역에서도 많은 이들을 매료했습니다.
Bektaşi 예배는 남녀가 함께 참여하며, 엄격한 율법 대신 와인과 춤이 포함된 의식을 통해 영적 깨달음과 사회적 유대를 중시하는 특징을 보였습니다. 특히 알바니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군단 해체 후 교단이 크게 확산되며,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지역적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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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체리 군단은 오스만 제국의 군사 엘리트로서, Bektaşi교단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 초기부터 제국의 군사적, 정치적 중추 역할을 했으며, Hacı Bektash Veli의 가르침을 따르며 Bektaşi 교단에 충성했습니다. 이 관계 덕분에 Bektaşi교단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26년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예니체리 군단을 해체하면서 이와 연관된 Bektaşi교단 역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예니체리 군단 해체 사건은 "Vak'a-i Hayriye" 또는 "유익한 사건"으로 불리며, 이로 인해 Bektaşi교단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예니체리 군단 해체 직후 술탄은 Bektaşi교단의 수많은 종교 시설과 자산을 몰수하고, Bektaşi교단의 교당(tekke)들을 강제로 폐쇄하거나, Sufi 이슬람 내에서 강경한 수니파 교단인 나크시벤디(Nakşibendi) 교단에 넘겼습니다. 이러한 억압은 Bektaşi교단의 구성원들이 반발하고 일부는 비밀리에 교단 활동을 이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추진한 세속주의 개혁으로 인해 모든 수피 교단이 터키 내에서 금지되었고, Bektaşi교단 역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터키에서 Bektaşi교단의 활동이 금지된 이후, 교단의 중심지는 자연스럽게 알바니아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Bektaşi교단은 알바니아 민족주의 운동과 결합하여 지역적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으며, 알바니아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는 종교적, 문화적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시기와 현대의 벡타시 교단 - 박해와 부활

알바니아의 공산당 정권이 Bektaşi교단을 박해한 배경은 종교에 대한 공산당의 강력한 탄압 정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67년,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지도자 엔베르 호자(Enver Hoxha)는 세계 최초의 "무신론 국가"를 선언하고 모든 종교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Bektaşi교단을 포함한 모든 종교 기관은 알바니아에서 철저히 탄압되었으며, 성직자들은 감시와 압력을 받았고, 많은 종교 시설이 강제로 폐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Bektaşi 신자들은 비밀리에 종교 활동을 지속해야 했으며, 많은 신자와 성직자가 체포되거나 처벌을 받았습니다.
 
특히 Bektaşi교단은 알바니아에서 중요한 문화적, 종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공산당 정부는 Bektaşi교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그들의 활동을 뿌리 뽑기 위해 다양한 억압 정책을 펼쳤습니다. 교단의 수도사원과 성소는 모두 폐쇄되었고, 많은 종교적 유산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성직자들이 교단의 전통을 지키지 못하도록 Bektaşi 의식 자체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처벌을 가했습니다. 이런 박해는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된 199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공산당 정권이 무너진 이후, 알바니아의 Bektaşi교단은 다시 활발히 활동을 재개했고, 알바니아의 주요 종교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전통을 되살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알바니아 정부가 Bektaşi교단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오히려 지원하게 된 계기는 1990년대 초반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민주화와 종교 자유 회복 운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오랫동안 탄압받던 모든 종교는 공산당의 몰락과 함께 공식적으로 자유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특히, Bektaşi교단은 알바니아의 정체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에 종교 자유 회복 이후 Bektaşi교단의 부활은 알바니아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공산당 몰락 후 알바니아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민족적 정체성과 문화적 연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Bektaşi교단과 같은 종교적, 문화적 전통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Bektaşi교단은 알바니아인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국가와 사회의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으로 재평가되었습니다. 정부는 교단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특히 알바니아의 문화와 종교적 다원성을 상징하는 Bektaşi교단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알바니아 정부는 Bektaşi교단의 종교 시설을 복구하고 전통을 지원하는 등 과거의 억압에서 벗어나 교단을 알바니아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습니다. 현재 Bektaşi교단은 알바니아 내에서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펼칠 수 있으며, 매년 열리는 Bektaşi 축제와 의식은 알바니아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발칸 반도의 보고밀파와의 관계

이러한 Bektaşi교단의 역사는 알바니아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발칸반도에서 발견된 보고밀파(Bogomilism)와 같은 종교적 혼합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그 독특한 교리와 의식을 유지해온 점은 알바니아의 종교적 유산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보고밀파는 발칸 반도에서 널리 퍼진 기독교 이단파로, Bektaşi교단의 포용적인 종교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보고밀파는 물질 세계를 악으로, 영적 세계를 선으로 보는 이원론적 사상을 강조했으며, Bektaşi교단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의식을 거부하고 본질적 가치를 중시했습니다. 이는 발칸반도에서 Bektaşi교단의 확산을 더욱 용이하게 했고, 발칸반도에서 문화적, 종교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Bektaşi교단은 오늘날 알바니아뿐 아니라 발칸반도와 유럽의 다양한 지역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 독특한 종교적 혼합주의는 현대 사회에서도 다원성과 포용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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